역사이야기 이순신이 여종과 잤다는 이야기 2020/07/13 13:25 by 無碍子

1. 이순신이 여종과의 잠자리를 난중일기에 고스란히 기록했다는 풍문이 있어 이순신의 스캔들을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로 살펴본다.

2. 介與之共

初九日丙子。朝晴暮雨。右虞候及康津告歸。饋酒泥醉。虞候則醉倒不歸。 ○夕。左水使來。別盃而送。則醉倒。宿于大廳。
初十日丁丑。雨。朝。更請左水使而來。別盃而送。終日大醉。未能出去。

3월 9일. 아침에 맑다가 비. 우우후와 강진 현감이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왔기에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다. 이별주를 나누었더니 바로 취해 쓰러져 대청에서 잤다. (介與之共 개介와 함께)

3월 10일 비. 아침에 다시 좌수사를 불러 술을 마셨고, 좌수사는 술이 취해 이날도 돌아가지 못했다.

=>대청에서 잔 사람은 좌수사(경상좌수사 이운룡)가 아닐까 싶다. 이충무공전서에는 介與之共이 누락되었다. 꽐라가 되어 대청에 쓰러져 자는 사람에게 여자가 필요할까 싶다.

3. 女眞共

十二日乙巳。風雨大作。晩出登途。十里許川邊。李光輔與韓汝璟佩酒來待。故下馬同話。安世熙亦到。暮到茂長。
十三日丙午。晴。李仲翼及李光輔亦來同話。仲翼多言艱窘。故脫衣給之。終日話。
十四日丁未。晴。又留。
十五日戊申。晴。體相到縣。入拜議策。

9월 12일. 비바람. 늦게 길을 나섰다. 10리쯤 가니 개울가에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했다. 안세희도 역시 도착했다. 저물어서야 무장현에 도착했다. (女眞여진) 체찰사를 맞이하려 무장현으로 간거다.

9월 13일. 맑음. 이중익과 이광보가 와서 함께 대화 했다. 이중익이 형편이 어렵다고해서 옷을 벗어 주고 종일 이야기했다.

9월 14일. 맑음. 휴식 (女眞여진) 그냥 쉰게 아니라 체찰사를 기다렸다고 봐야한다.

9월 15일. 맑음. 체찰사가 무장현에 도착했다. 인사드리고 대책을 논의했다. (女眞여진)

=> 체찰사(體相 아마도 이원익)를 맞이하여 관내를 안내하려 행차했던 기간이다. 역시 이충무공전서에는 女眞共이 누락되었다.


이건 초록인데 하여간 여진이라는 문자가 없는건 아니다. 가필한 무슨 암호문 같은데 쓴 사람만 의미를 알겠다. 아파 울었다는 글은 여기에서도 볼 수 없다고 한다.

4. 나는 모르겠다. 여진이 아파서 울었다는 기록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덧글

  • 거대한 눈꽃마녀 2020/07/13 15:42 #

    기독사회가 아니였으니
  • 無碍子 2020/07/13 19:36 #

    종교하고는..............
  • 라비안로즈 2020/07/14 09:19 #

    기독사회라도 잘놈은 잡니다.
  • 거대한 눈꽃마녀 2020/07/14 09:29 #

    기독인인데 그런짓 하면 크리스챤 명예훼손으로 불지옥 가산점 붙습니다 명심하시길
  • 2020/07/14 16:09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참홍삼파워 2020/07/14 18:24 #

    여진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군요.

    http://m.joongdo.co.kr/view.php?key=20110427000002326
    28일 제466회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일을 맞아 이순신 연구가인 이용호(75․전 명지대 교수)박사가 난중일기 오역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 박사가 지적하는 난중일기의 중요한 오역은 ‘여진(女眞)’인데 1977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행한 영문판에 여진을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여진은 여성이 아니라 ‘여진(余陣)’으로 ‘내 진영(陣營)’이다. 일기 옆 빈 공간에 적힌 여진을 일부 번역자들이 여성 이름으로 오역해 “여진과 함께 잤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진(女眞)’과 ‘여진(女眞)20’부분이 연세대에서 발행한 영문판에 “the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자다)”과 “spent the second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두 번째 밤을 보냈다)”으로 오역됐다. ‘여진’은 ‘내 군대(진영)’이며 ‘여진20’은 ‘군사 20명’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 박사는 “석세(石世)를 돌세로 읽는 것처럼 충무공은 이두(吏讀)를 많이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안될 전쟁터에서의 기록에 본인만 알 수 있도록 이두로 적은 것이며 이후 정조 때 판각에서는 후대의 오역을 막기 위해 아예 지워버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해 놓은 난중일기를 보면 병신년(1591년) 9월 12일 일기에 “晩出登途 十里許川邊 李光輔與韓汝璟佩酒來待 故下馬同話 安世熙亦到 暮到茂長(늦게 길을 떠나 10리쯤의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갖고 와서 기다리고 있기에 말에서 내려 함께 이야기했다. 안세희도 역시 도착했다. 저물어서야 무장에 도착했다”로 적혀 있고 14일에는 “又留(하루 더 머물렀다)”고 돼 있다.

    이 일기 여백 부분에 적힌 ‘女眞’과 ‘女眞20’을 진이란 여성과 하룻밤을 지내고 둘째 날을 묵었다고 해석한 것은 오류라는 게 이 박사의 지적이다.

    그는 또 “이런 잘못된 번역서가 외국으로 흘러가 또 다른 오역이 생기는 것”이라며 “소설이기는 하지만 대중적 인기가 높은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병인년 가을 여진을 덮치다’라고 표현해 성웅 이순신을 평가절하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현충사 송대성 기획운영과장은 “현충사 소장 난중일기에 여진과 여진 20, 여진 30이라고 적힌 부분이 있다”며 “이는 전란 중 충무공이 자신만의 암호를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無碍子 2020/07/14 18:54 #

    알지못한다가 답일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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