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병호시비(屛虎是非). 서애유성룡 학봉김성일 안동의 400년 전쟁 2015/02/23 18:30 by 無碍子

드라마 징비록의 주요 등장인물인 서애유성룡과 학봉김성일은 퇴계의 제자입니다. 누가 앞이고 뒤인지 우열을 가리 수 없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던 사이입니다. 당연히 당색도 같고요.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1573년(선조 6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리는 안동. 퇴계의 제자들이 퇴계를 배향하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웠어요. 그런데 1625년(인조 3년)에 서애와 학봉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퇴계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어요.
좌배향 즉 왼쪽에 모시는 분이 서열이 높습니다. 서애 쪽에서는 영의정이었으니, 학봉 쪽에서는 나이가 앞서니 하면서 서로 자기 조상을 좌배향 해야한다고 싸웠습니다.
서애의 제자와 학봉의 제자 그리고 서애의 풍산류씨와 학봉의 의성김씨 두 명문간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문의를 했는데 우복은 ‘연치(年齒) 차는 견수(絹隋)에 미치지 않고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 고 했어요.
간단히 견수와 절석을 설명하고요.
견수는 오년이장즉견수지(五年以長則肩隨之) 다섯 살 연상이면 대접해 드려야 한다는 말이고, 절석은 공경대신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 모시고 그 아래는 지정 좌석을 마련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죠. 즉 나이가 다섯 살 더 많으면 대접해 드리지만 두분의 나이는 네 살차이 이므로 가름할 수 없고 벼슬은 서애가 영의정 학봉은 관찰사급인 초유사였으므로 서애를 좌배향하는 게 옳다고 판결을 내려 수면 아래로 내려갔으나 끝난 건 아니죠.

여강서원은 나중에 숙종임금으로부터 호계서원(虎溪書院)의 편액을 받습니다. 이때부터는 여강서원이 아니라 호계서원입니다.

1805년(순조 5년) 영남유림에서 서애와 학봉 그리고 한강(寒岡) 정구(鄭達)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네분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키 위해 청원을 하는데 누구 이름을 앞에 세우느냐로 싸웠습니다만 결국은 서로 싸우느라 청원은 기각되었지요.

집권 노론은 서인에서 갈라진 정당이고 병산서원의 병유(屛儒)와 호계서원의 호유(虎儒)는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들이니 야당들끼리 싸우는 꼴입니다. 선현이 보셨더라면 통탄할 일이지요.

종내는 흥선대원군이 싸우지 말라고 하는데도 싸우다가 서원 자체가 철폐되었어요. 호계서원은 숙종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므로 철폐의 대상이 아닌데도 철폐되었습니다. 만인소를 올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871년(고종 8년) 도산, 서애, 학봉의 위패를 땅에 묻고 사당을 허물었습니다. 이리하여 강당만 남았는데 안동댐 수몰로 임하면으로 옮겼어요.

2009년 퇴계 서애 학봉 三家宗孫의 합의로 퇴계 이황 선생을 중심으로 좌배향에 서애를 우배향에 학봉을 봉안키로 합의가 이뤄져 그동안 병산서원과 호계서원간 다툼인 400년 병호시비(屛虎是非)는 일단 해결되는 듯싶었습니다.

꺼진 불도 살리고 보자.
사연인 즉 호계서원을 안동댐 옆 민속박물관 인근에 재건하기로 했어요. 근데 말이죠. 거기는 땅이 좁아 서원을 세울 형편이 안됩니다. 그래서 한국국한진흥원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터도 넓고 또 국한진흥원과 연계하여 활용도가 높다는거죠. 일리가 있어요.

근데 거기는 도산서원과 가깝습니다. 원래 안동과 예안은 다른 행정구역이었다고 합니다. 안동의 호계서원 예안의 도산서원이 양립했는데 도산서원 가까이에 호계서원을 이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죠. 역시 일리는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야기를 전해 올립니다.

400년만에 끝난 유림의 위폐서열 싸움, 병호시비(屛虎是非)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전말(顚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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