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화(近代化)
근대화라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해 가는 역사적 전개과정으로서의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산업화를 토대로 현대사회가 전통사회로부터 어느 만큼 벗어났는가를 측정하는 도구로서의 개념이다.
개화라는 개념이 60년대 정부가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올린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당연히 산업화 공업화를 근대화로 인식되었습니다. 민주발전 국민주권 시민국가 같은 근대화의 개념은 뒤로 물러났습니다만, 산업화 공업화가 근대화가 아니라 탈봉건과 산업화가 동행할 때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2. 조선의 근대화(탈봉건)
2-1.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경향각지에서 대대적인 의병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의병은 근왕병입니다. 의병은 만주로 기지를 옮겨 광복군이 되는데 저 유명한 안중근장군님은 대한민국광복군이 아니라 대한제국광복군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복벽주의는 여전히 존재 했었습니다.
2-2. 양국조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1910년 8월 29일 양국조서(讓國詔書)
2-3. 자각
융희는 나라를 장중지물처럼 여기고 그걸 일본왕에게 넘겨줍니다. 이에 민중들은 자각합니다. 사실 대한제국이던 조선왕국이던 이름이 뭐든간에 나라는 융희 개인의 재산이 맞습니다. 이론적으로 나라의 주인인 융희가 명치에게 나라를 넘긴 걸가지고 주권도 없던 조선백성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죠.
“융희 황제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발생의 때요, 구 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의 최초의 날이니, (중략) 고로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
2-4. 대한민국의 건국과 탈봉건
1919년 4월 23일 전국 13도 대표 24명은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합니다. 헌법인 약법(約法)에 국체(國體)를 민주제(民主制)로,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함으로 탈봉건을 선언합니다.
3. 일제에 의한 산업화
3-1. 포스트잇
3M의 스펜서 실버라는 연구원이 새로운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패했어요. 이걸로 붙이면 그냥 힘없이 떨어져요. 이 실패한 접착제로 3M은 포스트잇이라는 신제품을 만듭니다. 의도하지 않은 성공이지요. 우리나라의 이태리타월도 의도하지 않은 성공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3-2. 나는 일본이 한반도를 근대화 시키려는 의도가 눈꼽만큼도 없었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공업이 이식되었습니다만, 거기에 조선인 로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임금구조를 잘 알지 못하지만 머슴살이보다 노가다 뛰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공장로동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기술을 습득합니다. 이게 나중에 대한민국 공업화에 큰 밑천이 됩니다.
3-3. 조선반도의 산업화 공업화
1930년대 일본은 이미 늙었습니다. 젊은 조선으로 신흥기업가들이 달려왔습니다. 대표적인 게 노구치(野口遵)의 일본질소입니다. 그는 흥남을 세계적인 공업도시로 만들었어요. 나는 흥남이 대한민국의 공업도시 특히 울산을 만드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물론생각이 그렇다는게지 증거는 없습니다.)
4. 대한민국의 근대화
4-1. 산업화 공업화
일본이 만든 산업화 공업화는 6.25때 소멸되었다는 말은 말이죠. 오늘 먹은 밥이 내일아침이면 똥이 되고 또 배고프니 먹을 필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먹은 밥이 다 똥이 되는 게 아니고 일부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됩니다.
사실 한반도 남부지역에 일본이 만든 공장이나 발전소는 별로 없었어요. 그러나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요.
왜정시기 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왜정시기 양성된 인재들이 대한민국의 산업화 공업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의도와 무관합니다.
4-2. 대한민국의 탈봉건
조선반도에서의 탈봉건은 조선왕조(혹은 대한제국)의 소멸에서 시작됩니다. 이 역시 일본의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근대화라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해 가는 역사적 전개과정으로서의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산업화를 토대로 현대사회가 전통사회로부터 어느 만큼 벗어났는가를 측정하는 도구로서의 개념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화[近代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개화라는 개념이 60년대 정부가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올린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당연히 산업화 공업화를 근대화로 인식되었습니다. 민주발전 국민주권 시민국가 같은 근대화의 개념은 뒤로 물러났습니다만, 산업화 공업화가 근대화가 아니라 탈봉건과 산업화가 동행할 때 근대화라고 생각합니다.
2. 조선의 근대화(탈봉건)
2-1.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경향각지에서 대대적인 의병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의병은 근왕병입니다. 의병은 만주로 기지를 옮겨 광복군이 되는데 저 유명한 안중근장군님은 대한민국광복군이 아니라 대한제국광복군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복벽주의는 여전히 존재 했었습니다.
2-2. 양국조서

2-3. 자각
융희는 나라를 장중지물처럼 여기고 그걸 일본왕에게 넘겨줍니다. 이에 민중들은 자각합니다. 사실 대한제국이던 조선왕국이던 이름이 뭐든간에 나라는 융희 개인의 재산이 맞습니다. 이론적으로 나라의 주인인 융희가 명치에게 나라를 넘긴 걸가지고 주권도 없던 조선백성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죠.
“융희 황제가 삼보(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발생의 때요, 구 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의 최초의 날이니, (중략) 고로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포기는 즉 우리 국민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
2-4. 대한민국의 건국과 탈봉건
1919년 4월 23일 전국 13도 대표 24명은 한성임시정부를 선포합니다. 헌법인 약법(約法)에 국체(國體)를 민주제(民主制)로, 정체(政體)는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함으로 탈봉건을 선언합니다.
3. 일제에 의한 산업화
3-1. 포스트잇
3M의 스펜서 실버라는 연구원이 새로운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패했어요. 이걸로 붙이면 그냥 힘없이 떨어져요. 이 실패한 접착제로 3M은 포스트잇이라는 신제품을 만듭니다. 의도하지 않은 성공이지요. 우리나라의 이태리타월도 의도하지 않은 성공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3-2. 나는 일본이 한반도를 근대화 시키려는 의도가 눈꼽만큼도 없었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공업이 이식되었습니다만, 거기에 조선인 로동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임금구조를 잘 알지 못하지만 머슴살이보다 노가다 뛰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공장로동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기술을 습득합니다. 이게 나중에 대한민국 공업화에 큰 밑천이 됩니다.
3-3. 조선반도의 산업화 공업화
1930년대 일본은 이미 늙었습니다. 젊은 조선으로 신흥기업가들이 달려왔습니다. 대표적인 게 노구치(野口遵)의 일본질소입니다. 그는 흥남을 세계적인 공업도시로 만들었어요. 나는 흥남이 대한민국의 공업도시 특히 울산을 만드는데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물론생각이 그렇다는게지 증거는 없습니다.)
4. 대한민국의 근대화
4-1. 산업화 공업화
일본이 만든 산업화 공업화는 6.25때 소멸되었다는 말은 말이죠. 오늘 먹은 밥이 내일아침이면 똥이 되고 또 배고프니 먹을 필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먹은 밥이 다 똥이 되는 게 아니고 일부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됩니다.
사실 한반도 남부지역에 일본이 만든 공장이나 발전소는 별로 없었어요. 그러나 사람은 있습니다. 사람요.
왜정시기 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 왜정시기 양성된 인재들이 대한민국의 산업화 공업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의도와 무관합니다.
4-2. 대한민국의 탈봉건
조선반도에서의 탈봉건은 조선왕조(혹은 대한제국)의 소멸에서 시작됩니다. 이 역시 일본의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덧글
분명히 일제시대때 조선에 근대적 요소가 이식이 된게 맞고,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가 산업화에 성공한건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상대편이 조선을 쪽쪽 빤다고 이쪽은 일제를 쪽쪽 빨아대니 한심한거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둘 다 발로 차는게 맞습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에 '기반해서' 대한민국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1공이나 3공의 통치 방식이나 국가 발전 모델만 해도 일제나 만주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고(물론 전략적, 기술적 차원에서 일부 참고해서 갖다 쓴 요소들이 있긴 하지만)
또 성취를 주도한 국가 행정 관료(미국 유학파)들과 기업인들(일제 시대 대부호 가문들과 지금의 재벌들 사이에선 '물갈이'에 가까운 변화가 존재) 역시 일제 당시의 기득권을 향유하던 인물들 혹은 그 인물들을 계승한 사람들이 아니었죠.
그런 점에서 이승만, 박정희야 말로 일제의 유산과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형 체제와 모델을 창출했다고 봐도 무방하죠.
특히 토지수탈, 미곡 수탈은 증거가 없어요.
오히려 조선총독부가 상당히 공정하게 집행했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일본보다 조선의 쌀이 더 싸서 일본이 많이 수입해간 것입니다.
정당한 가격을 치르고요.
물론 조선 소작농은 가난했겠지요. 왜냐면 조선인 지주와 마름들이 이익을 챙기고 말았으니까요
근대적 요소가 도입되었던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해야 마땅한 사실 그 자체이고
여기서부터 일본을 긍정하고 찬양할 것인가, 일본의 의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길로 갈리죠.
전 약간 전자에 기울어집니다.
왜냐면 일본이 조선을 그냥 빨아먹는 수탈식 식민지로 생각한게 아니라 정착형, 더 나아가서 완전한 일치된 국가를 계획했으니까요. 46년에는 조선에 참정권을 줄 계획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고 총독부가 꾸준히 경제발전에 힘썼던 것, 대중의 기본 교육(고등 교육은 좀 아니지만)에 힘썼던 것, 일반인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힘썼던 것 등은 그런 자세의 증거가 아닐까요?
뭐, 물론 조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일본 본토의 물 건너 또 다른 일본 땅을 위해서겠지만
어쨌든 반도 수준의 향상을 위해서 한 것은 맞지요.
44년 의무교육 계획, 46년 참정권 계획 등은 조선인들에 대한 전시 동원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봐야죠. 전쟁하다 쫄려서 그제야 갖다 쓴 수를 완전히 일치된 평등국가화를 꾀한 것이라고 봐선 안된다고 봅니다. 이승만이 건국을 하자마자 실시했던 조치를 왜 수십년간을 미뤄오다 패전해서 망할 거 같으니 그제서야?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식민통치를 한 것은 사실이고, 그 '자신들'에는 열도의 일본만 포함되었지 반도의 조선은 포함 되지 않았습니다. 식민통치를 통해 완전히 평등한 일치국가를 꾀한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빵셔틀로 부려먹으려 했을 뿐이지요.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식민 통치를 했다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이미 읿본 땅이었고 조선인들 또한 제2 국민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했던 것은 역시 조선 반도와 조선인들에게도 상당수 해당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쓸모있는 빵셔틀로 부려먹으려 했다면 조선인이 고위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는 있어서는 안되었지요.
그리고 참정권 수여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순히 '전쟁하다 쫄려서 갖다 쓴 임시방편'이라고 폄하할 수 없는 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내에서도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여 실질적인 합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온건파의 주장이 있어왔으며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청년들이 일본 청년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피흘리며 싸우게 됨에 따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조선 지도자들 또한 우리가 의무를 수행하니 이에 따른 권리도 마땅히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본을 방문하여 요청하기도 했고요.
다이쇼 데모크라시 때 일부 리버럴한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인들의 권리와... 더 나아가선 독립까지 주장한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당시 정책을 주도하던 일본 정부의 실제 행동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거죠.
다수의 구라파 국가들도 아프리카 같은 자원 빨대지역이 아닌 전략적 진출 거점이 되는 곳에는 일본 못지 않은,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정도의 근대화 문물 이식과 시도를 꾀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사례를 공부하다 보면 왜 일본이 그네들과 우리를 동등하게 대해준 것이 아니며 당대 식민지 였던 국가들이 영연방이란 개념을 긍정하게 되는지(우리와는 다르게) 잘 알 수 있죠.
따위의 글을 인터넷에 써제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컨셉형인 경우가 많고(야갤러의 경우)
그 외에도 국뽕식 주입에 빠져있다가 탈뽕하고보니 극심한 배신감에 국까로 돌변한(역갤러) 경우지요.
저런 극단적인 일뽕의 경우를 제외하고 보면 실제 일본은 동양 국가들 중에 가장 먼저 근대화가 되었으며 민도 수준도 현재까지 가장 나은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는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보아 아직 한국보다 우월(이런 단어를 쓰는건 약간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한 부분이 많이 있으며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양국가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들이 많거든요(한국에서는 무조건 우리쪽 주장만 알리는데 저쪽 주장을 들어보면 흠칫할만한 것들도 많습니다).
따라서 반일이나 찬양질이라는 극단적인 자세가 아니라 지일, 나아가 극일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현재로선 많이 쳐지는 부분을 따라잡기 위해 자아비판과 함께 일본을 벤치마킹 해야하는데 이걸 대놓고 말하면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히니 발전 속도가 워낙 지지부진...
한, 일을 모두 겪은 서구 사람들에게서 객관적으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국민성이라거나 일상에서 접하는 부분들을 볼 때는 아직 확실히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강박증에 가깝게 행동하기도 하지만
아직 한국인들은 자기 중심적인 언행이 너무 많죠.
뭐, 제 경험이 단편적인 걸 수도 있겠지만... 일본보다 민도면에서 앞섰다고 충분히 평가 받을 수 있는 서구 국가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 의식이라 하면 별로 그닥... 단지 타인에 대한 배려 의식 같은 게 더 좋다고 민도가 높다고 평가하긴 힘들죠.
그리고 식민지근대화론은 경제가 발전 development 했다는 말이 아니고
종속화라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합니다.
경제가 퇴보 retrogression가 아닌 성장 growth했다는 말이고
한계가 있고 마지막에 퇴보하지만, 일정 기간동안 진보 progress했다는 이야기에요.
김낙년 교수 저서만 봐도 잘 나와있죠. 시혜론과 식근론을 동일선으로 보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뭐 교학사 사태와 경향 일보를 보면서 역사 인식에 좀 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