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해방과 나치부역자 처리과정 가.개관 "보복을 당한 것은 독일병들만이 아니었다. 독일 장교의 정부(情婦)였던 프랑스 여성들도 끌려나왔다. 그녀들은 머리를 빡빡 깎이우고 드러낸 가슴에는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졌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나는 독일병과 잤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달고 파리 시내를 조리돌림을 당했다." 해방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순간이었다. 전시중에 프랑스를 형식적으로나마 지배하였던 비쉬정권의 지도자들과 협력자들에게는 '부역자'라는 이름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병과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들에게조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은 조롱과 모독을 준비하여 두었다. 해방과 더불어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처단의 선풍이 불었다. 제대로 사법절차가 갖추어지지 않은 채 즉결처형이 실시되곤 하였다. 적지 않은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보복적 처단도 적지 않았다.복수의 열정이 이성과 합법성을 제쳐놓았다. 다음의 한 묘사는 당시의 보복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하였던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에 따른 숙청은 프랑스혁명기의 공포정치에 비유되고 당시의 잔혹성은 전시의 적에 의한 것만큼이나 과도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부역자인 남편이 살해되고 이어 부인이 강간당한 채 자신의 11살된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묶인 사람이 자신의 딸이 12번이나 윤간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또다른 경우 아이는 내팽개쳐진 채 그 어머니가 강간당했다. 고문이 처단 직전에 따랐다. 부역 혐의자의 눈을 찌르고, 생식기가 짤리고, 불타는 침대 위에 눕혀졌다. 한 신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고 생식기를 총격한 뒤 생매장 되었다. - - -여성들의 경우 가슴이 도려내 졌다. 부역자들은 맨발로 깨진 유리 위를 걸어야 했고, 여성 부역자는 체포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나체가 되었으며 동물과 같이 교미하여야 했다.- - -" 그러나 아무도 실제로 얼마나 많은 프랑스인이 부역죄로 처형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전쟁의 마지막 순간과 해방의 초기에 자의적인 복수와 임의적인 처형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권위있는 기관이 정확성을 가진 통계 숫자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그 처벌의 숫자를 알기는 어렵다. 전후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 드골은 '자유프랑스'를 이끌고 나치독일과 싸운 지도자로서 부역자의 처벌과 숙청, 비쉬시대의 청산에 의욕과 관심을 보인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그 처단과 숙청은 자못 극단적이고 지나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부역자처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해방의 시기에 드골은 역사상 비쉬의 말소 및 레지스탕스의 상대적 평가절하라는 양면의 정책을 취했다. 그것은 국외에서 싸웠던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국내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드골의 알력과 분열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부역자 처단과 사회개혁을 열망하던 레지스탕스 세력과 페탕주의자 조차 끌어안으며 정치적 안정을 기해 보려던 드골은 다함께 쓴 경험을 맛보아야 했다. 레지스탕스의 원래의 목표는 좌절되었고 국민적 지지는 옅어져 갔다. 사분오열된 국민여론을 끝내 통합시키지 못한 드골 역시 1946년 1월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정치권력의 풍향에 따라 부역자의 역사적 평가와 그들에 대한 처단의 경험과 사면문제등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퐁피두 대통령은 과거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표방하였다. 1974년 지스카르 데스텡의 대통령 당선은 그러한 드골 우파의 지배에 종언을 고하게 하였다. 당초 전쟁 중에 자신이 레지스탕스 그룹에 속했다고 주장까지 한 데스텡은 점차 모호한 자세를 보이면서 레지스탕스 기념일을 국경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거나 페탕의 무덤에 화환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는 '자유주의 얼굴을 한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1974년 이후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전선이 이루어졌고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당선으로까지 이어졌다.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부역자에 대한 확고히 비판적 입장을 취한 미테랑을 공공연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권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나치점령과 비쉬정권, 부역자와 그 처단의 문제가 원칙을 잃고 표류하거나 민족 의식이 지향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나.형사적 처벌 (1) 부역자에 대한 처단의 경고 이미 1940년 7월 13일, 비쉬정권이 수립되던 바로 그 시기에 런던에 있던 드골은 해방된 프랑스는 기필코 부역행위에 책임있는 자들을 처벌할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치독일과 비쉬정부에 몸담고 있거나 이들을 지원하는 부역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941년에 들어서서 그 경고는 보다 구체성을 띄기 시작하였다. 자유프랑스가 운영하던 런던라디오 방송은 우리는 애국자의 죽음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밀고자, 불쌍한 판사, 불명예스러운 군인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 - - 이 경고가 아직도 자신의 양심과 머리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도록 하자는 선동을 내보냈다. 프랑스 본토의 레지스탕스 언론 역시 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을 수없이 다짐하였다. 남부지역에서 발간되던 리베라시옹은 정기적으로 부역자들의 명단을 담은 블랙 리스트를 실었다. 이 신문은 또한 당신의 조사를 늦춰라. 너무 심하게 조사하지 말라. 당신의 보고서 내용을 줄여라. 그렇지 않으면 경찰 내부에 있는 소수의 정보원에 의해 당신들은 우리의 리스트에 새겨질 것이고 해방된 프랑스가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독일의 러시아 침공이 있은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장래의 처단에 관하여 확고한 경고를 보냈다. 이 경고의 첫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설치된 비쉬특별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이 경고를 통하여 "독일인들이 영원히 파리에 있을 수는 없다"면서 독자들에게 판사들의 이름을 기록해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1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이 되면 처형되거가 구속해야 할 부역자들의 명단 작성을 시작하였다. 1941년 10월 리용에서는 독일의 첩자, 부역 경찰관, 판사, 언론인에 대한 보복 리스트 작성을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심지어 이 포스터는 이들 부역자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농민과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부역자의 집에 부역자임을 표시하고 처단을 경고하는 스티커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디에프에서는 '민족전선' 이름으로 부역자 명단을 점검하고 부역자의 집에 확인표시를 할 비밀재판소의 설치를 발표하였다. 블랙리스트의 발상은 비공산계 지하신문들에도 손쉽게 채용되었다. 1943-1944년 사이에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준비와 발행은 프랑스 전역에 보편화되었다. 심지어 런던의 BBC 방송과 알지에서의 방송도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였다.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공개는 부역자들에 대한 경고와 혼란을 주었고 그대신 레지스탕스에게는 승리의 도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2차대전 후의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연구 변호사 박원순 |
6.25 때의 전시부역자 처벌도 마찬가지였을 겝니다. 프랑스에서 말입니다.
1. 재판없이 처벌받은 전시부역자들이나 후손이 억울하다면서 나댄 적이 있었습니까?
2. 부역자나 부역의심자를 처벌한 민병대나 군경을 악으로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까?
덧글
무애자님이 금정굴 사건을 변호할 생각으로 프랑스 사례를 드신 거라면 적절하지 않은 대응이라고 봅니다.
논조까지 일일이 검열하려 드네
우리나라도 비슷한데 지금 와서 바로 잡으려고 해도 일부사례로 치부해 버리고, 어떤 경우는 소문이나 괴담으로 비화하는(또는 시키는) 경우도 있었구요.
그런 점에서 국가안정에는 유리하지만 위험성이 내포된 프랑스의 사례를 흐지부지된 과거 이승만 정부시절의 반민특위 등과 비교하여 모범사례로 들었던 어느 정치학 교수의 강연을 들었을 때에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하자면 "있다"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숙청자 가족들이 숙청의 가혹함과 자신들을 피해자로 묘사한 책을 출판하여 1980년대 클라우스 바르비, 폴 투비에, 모리스 파퐁 등이 체포되기 전까지, 숙청의 가혹함에 대한 '기억'이 주류 여론을 차지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후 투비에, 파퐁 등의 부역자, 반인륜 범죄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과거사 청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기억'이 주류를 이루게 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숙청과 기억의 역사(1944~2004)』를 보시죠.
1941년 이전 독-소 불가침의 밀월기간중에는
프랑스 공산당이 나치에 협력했음을 암시하는 말일까요??
역사란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 재판없이 처벌당했다는 증거는 있나? 그리고... 그때 재판없이 처벌받아서 이제와서 뭐 어쩔건데? 당시 집행관이나 관련자 찾아내서 그 아들이나 손자들 연좌제 걸어서 처형할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그 사람들이 빨치산이나 좌익 활동가의 가족이거나, 아니면 당사자가 진짜로 인민군이나 빨치산의 부역자이거나, 그 협력자로 밝혀지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리고 일제가 끝나고 친일파들이 죽은지 반세기가 지났는데 이제와서 뭘 어쩌자고 친일파 친일파 드립을 치나? 그리고... 그렇게 억울한 피해자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너님 진영에서는 어째 그런식으로 감정적인 친일파 청산을 해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문제는 생각 못했나 몰라.
나도 군대 정신교육이나 사단장이나 이딴놈들 훈시하는게 레알 조옷같긴 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는건데???
당시 일부 민병대나 서북청년단, 족청, 백의사, 대동청년단 등이 저지른 일을 왜 국가가 사과해야 하지??? 서청이나 족청이 국가기관이오? 어디서 횡설수설 헛소리 늘어놓고 인신공격이나 하면서 쾌감 느끼는거, 그거 별로 좋은 취향같지는 않수다. 심리상담이나 받아보슈.
언제 잘난척 꽤나 하던데... 솔직히 남의 블로그에 달라붙어서 욕하거나 비꼬거나, 자기편 진영 감싸는건 댁이나 나나 도찐개찐이면서 뭐가 잘났다고 그리 잘난척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