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이덕일의 역사관 2012/03/28 20:11 by 無碍子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님에 관한 글입니다.

왕조 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1권, p.181)

인조반정이 그랬다. 유학자들이,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았다. 왕조국가에서 역적질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역적질을 할 때도 명분은 있어야 하는 법. “우리 임금은 명나라 황태자고, 조선의 임금은 제후에 지나지 않는다. 제후는 사대부와 같이 신하들이다. 제후(신하)에 지나지 않는 광해군이 명·청이 싸울 때, 청나라 편을 들었다. 명에 대한 불충을 저지른 왕을 내쫓는 것은 올바르다. 이런 주장이었다. 못 들어봤지? 자기들한테 불리한 얘기는 안 하지.”

“서인이 볼 때, 조선의 임금은 왕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신하니까,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해야 한다. 남인 입장은, 왕가의 예법은 사대부의 예법과 다르다는 거였고. 어떤 게 맞는 거 같나. 왕조 국가에서 국왕이 떠났는데, 사대부와 예법이 같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송시열이 1차 예송논쟁에서 1년복을 주장했는데, 장례법에 대한 책부터 다시 봐야 하는 사람이다. 일반 평민의 것을 들이대다니. 예송논쟁, 복잡한 것 같지만, 핵심은 인조반정의 논리, 즉 우리의 진정한 군주는 명 황제고, 조선 임금은 신하에 지나지 않는다와 맥락이 닿는다.”

예스인터뷰 교과서에 실린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허구? -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1. 신하가 임금을 폐립(廢立)한 전례가 광해군외에도 많고 많습니다.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폐하고,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한 것도 그러한가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을 시해한 것은요?
그들은 명나라 생기기 전이고 사대부가 나오기 전이라고 칩시다.
조선왕 대명제국의 제후에 불과해서 같은 반열인 사대부들이 맘대로 갈아치울 수 있다는 주장은 연산군(燕山君)을 성희안(成希顔)과 박원종(朴元宗)이 폐위시킨 것도 그러한가요?

2. 예송논쟁은 국왕과 사대부의 장례 예법을 같이 하라는데서 출발한 게 아니올시다. 이덕일 소장님이 그걸 모르시지는 않았으리라봅니다.
차남으로 태어난 왕이라도 왕이니 장자의 예로 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원래 차남이었으니 차남의 예로하는 게 옳은지에 관한 다툼이었습니다.


글고 분문과는 관련 없지만, 모화사대, 식민매국론자들이 부사년(傅斯年) 서량지(徐亮之) 엄문명(嚴文明)을 빠는 이유도 모르겠다.
그 눔들이 얼마나 숭악한 눔들인데...



덧글

  • 방문 2012/03/28 20:34 # 삭제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는 "장자"라는 것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장자"가 있으면 당연히 왕실이든 가문이든 그 종통은 장자가 계승하는 것이 법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아니었던 세조, 선조, 인조가 새로운 종통을 열었다고 그 후계자들이 억지로 묘호에 종이 아니라 조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효종이 죽자 후계자인 현종입장에서는 장례를 어떻게 치루어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당연히 효종이 장자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효종은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런데, 효종이 종통 계승권이 없던 차남이었고, 소현세자에게는 아들이 세명이나 있었습니다. 원래 유교적 질서로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어야 했습니다.

    예전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자랑하던 시골 노인네들이 "종손'에 대해서 어떤 취급을 했는지를 아신다면, 예송논쟁이 단순히 장례절차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닌 것임을 알것입니다. 왕과 사대부가 같은 신분이냐 , 왕이 사대부 보다 높은 신분이냐의 중요한 쟁점입니다.

    그래서, 현종의 즉위 초기의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이겼지만,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된 2차 예송논쟁에서는 왕의 편을 든 남인이 현종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 無碍子 2012/03/28 20:41 #

    장자가 아니었던 세조, 선조, 인조가 새로운 종통을 열었다고 그 후계자들이 억지로 묘호에 종이 아니라 조를 넣었습니다.

    ==>태종 세종도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 방문 2012/03/28 20:56 # 삭제

    태종이 왕위 계승할 때 중간에 정종을 끼워 넣었죠, 그런데, 왕실 족보를 편찬하면서 정종을 쏙 빼버리고 묘호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즉, 태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이어 받았다는 의미였지요, 정종이 묘호를 받은 것은 한참 후 였습니다.
    세종은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태종이 폐하고 세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세자로 있다가 태종의 양위에 의하여 즉위하였습니다. 즉, 계승권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이어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태종과 세종은 종통을 새로 열었다고 묘호에 조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묘호에 조를 붙일 때는 큰 업적을 이루었을 때이지만 조선시대를 보면 명분은 업적이 컸다고 하지만 실제는 종통을 새로 열었을 때 조를 붙였습니다. 물론 영조, 정조), 순조는 사정이 약간 다릅니다. 이 세명은 묘호가 원래 종이었는데 후대에 조로 바꾸었습니다. 영조, 정조는 고종이 황제라고 자뻑하면서 윗대의 왕들의 존호를 올린 것이고, 순조 또한 장례식 다 끝나고 8년 정도 지나서 공이 크다면서 조롤 올렸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2/03/28 21:37 #

    방문 님// 묘호가 "조"가 된 것은 "종통을 새로 열었다"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명분을 사용한 점도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 再造之公이라던가 종통을 바로 잡았다(중국의 기록에 잘못 나타난 이성계의 선조에 대한 오류를 외교전을 펼쳐 바로잡음)라던가 하는 식의 "높은 공"이 중심입니다. 오히려 종통을 새로 열었다는 식의 주장이 소수인데 말이죠.
  • 방문 2012/03/28 21:15 # 삭제

    조선 예종과 성종 계승은 삼촌과 조카의 계승이었는데, 성종은 세조의 첫째아들의 아들이었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서 받쳐주고 있었으니 구지 종통 문제에 거리낄 건 없었고, 헌종과 철종의 계승에서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고 고종과는 또 촌수가 엄청 멀었으니 구지 챙겨줄 필요가 없었지요.

    원래 묘호에 "조"를 붙이는 것은 무지 무지 큰 업적을 재위중에 기록하거나, 왕조를 새로 연 개창자이거나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린 황제에게만 붙이는 것이 원래 중국에서 사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조 자를 남용하였습니다. 묘호는 후계자가 신하들의 청을 받아서 정하는 것인데 큰 업적도 없는데 조를 붙인 이유가 뻔하지요.
  • 방문 2012/03/28 21:21 # 삭제

    아 착각했네요, 인터넷 검색해보니 순조는 1857년 철종때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 ㅋㅋ 2012/03/31 03:29 # 삭제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전임자의 양자와 같은 개념으로 봤습니다. 당연히 성종은 의경세자의 아들로서 계승한게 아니라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이는 왕조실록에 의경세자를 바로 덕종대왕으로 추존하지 않고 의경왕(왕)으로 추존했다가 의경대왕(대왕)으로 추존하고 덕종의 묘호를 바친게 하나의 증거입니다.
  • 無碍子 2012/03/28 22:01 #

    방문객 선생님//
    영종대왕(英宗大王)은 무려 서장자였습니다.
    서장자도 장자축에 들어갑니까?
  • 방문 2012/03/28 22:16 # 삭제

    영조(종)은 서자였지만, 경종 생존시에 이미 세제로서 계승권을 인정 받았으며, 즉위 이후에도 황형(경종)이 자신을 보호했다면서 경종으로부터의 정상적인 종통 계승을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에서 말했듯이, 묘호는 후계자가 신하의 청을 받아서 정하는 것입니다. 정조(정종)이 자신의 계승권이 경종-영종-사도세자-자신을 통해서 정상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굳이 조를 올릴 필요가 없어지요.

    그리고 야스페르츠님, 제가 앞에서 명분은 업적이 컷다고 했지만이라고 썻듯이 원칙은 큰 공을 세워야 조를 붙이는 것이지만 조선에서는 종통을 새로 연 왕에게 조를 붙였습니다. 명분과 실제 사용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세조는 찬탈이고,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고, 인조는 선조의 서자의 아들인 방계였습니다. 그래서 종통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지요.
  • 야스페르츠 2012/03/29 00:22 #

    방문 님// 그렇게 따지자면 반정군주인 중종도 조를 받아야지요. 물론 인종 때에도 중종의 묘호를 조로 하자는 논의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때의 논리에서도 "세조는 노산에서 끊긴 종통을 다시 이었지만 중종은 연산군 그냥 스킵하고 성종에서 다이렉트임"이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이 논리 자체는 세조와 중종의 비교에서는 완벽한 논리지만, 중종과 서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는 인조는 이 논리에 따르면 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반대로 순조의 경우만 해도 종통을 강조할 필요가 전혀 없는 군주죠. 하지만 조를 받았습니다. 게다가 순조를 조로 추숭한 철종은 엉뚱하게도 방계이면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된 케이스죠. 이는 어떤 면에서는 헌종의 계승을 무시하다시피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고종은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익종의 양자가 되면서 헌종, 철종 두 왕을 전부 부정(?)하는 무시무시한 업적을 세우기도 했으니...

    저도 종통 계승이라는 명분이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후계 군주가 정하는 것이 묘호인 마당에 이미 왕노릇 다 해먹고 무사히 승계까지 마친 뒤인 후계자가 무엇하러 아비의 종통을 강조하기 위해 묘호로 장난질(ㅡㅡ;;)을 하겠습니까. 차라리 광해군처럼 본인의 즉위가 아슬아슬한 경우라면 모르겠습니다.
  • ㅋㅋ 2012/03/31 03:34 # 삭제

    경종-영종-효장세자-정조 입니다. 사도세자는 생부였지만 영종대왕에 의해서 이미 10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했습니다.

    사도세자는 1898년에 장종대왕으로 추증되었다가 그해 대한제국 수립하고 1899년에 장조 의황제로 추상됩니다. 동시에 정조도 1898년까지는 정종대왕이었는데, 1899년부터 정조가 됐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정조가 아니라 정종이 되어야 합니다.
  • ㅋㅋ 2012/03/31 03:38 # 삭제

    인조도 즉위가 아슬아슬하였기에 정원군을 대원군에서 왕으로 추존하는 무리수를 뒀고
    본인도 사후에 열종이 되었는데 인조로 바뀌는 수난아닌 수난을 겪게 됩니다. 전혀 어질지도 못한 임금이 인조라는건 아이러니한 개그.
  • gmmk11 2012/03/29 00:56 # 삭제

    근데 번속이 조종운운하며 싸우는데 명이나 청은 이걸 가만놔뒀나요.;;
  • 無碍子 2012/03/29 20:01 #

    세종대왕의 예를 든다면 국내용 문서에는 세종(世宗)으로 명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장헌(莊憲)으로 썼습니다.
  • 2012/03/29 04:15 # 삭제

    댓글을 읽었는데 좀 이상하게 흐르는듯 하네요 ㅡㅡ; 제가 잘 이해를 못했는지 모르지만. 예송논쟁에서 왕가의 예법은 사대부의 예법과 다르다는 말은 일반의 사대부 집에서는 장자인 종손만 인정하지만 왕가의 예법은 왕가의 피라는 특수성이 있음으로 둘째던 방계던 왕통을 잇게 되면 그때부터는 흠결없는 장자로 대우받는다는 것아닌가요 즉 이는 사대부가문과 다르게 왕실의 경우 정통성 문제가 곧 국가적 역량이 담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예외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고 남인은 이를 두고 왕가의 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사대부의 장자와 종손의 논리는 유교의 보편적 예법임으로 왕실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가 서인의 주장이었죠. 예송논쟁은 그 내용은 장례절차를 두고 차남의예로 하는지 장남의 예로 하는지의 싸움이 아니라 기 본질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왕실의 특수성과 권위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이덕일 소장의 해당 발언도 이런 것의 연장이 아니였는지요. 댓글을 보니 무슨 대화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ㅡㅡ;
  • 2012/03/29 04:49 # 삭제

    필자분계서 오해를 하시는게 맹자가 걸주왕의 고사를 인용하며 군주가 필부일 경우 이미 군주가 아니라 천명한 이후 임금을 폐하는 예는 수없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명분은 언제나 유교의 예법에 따른 것으로 전한시대 효경이 정치 이데올로기 체제로 확립된 이후 유교식의 충과 군신관계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나라들이 국가를 지탱하는 틀이자 이데올리기이기도 합니다.(영류왕과 연개소문을 언급하셨는데 이세민이 고구려를 원정한 명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셨으면합니다.) 이덕일씨가 언급한 것은 광해군의 폐위의 명분으로 나온 명나라와의 의리문제는 기존의 군주를 폐하는 논리인 군주로써의 인과 의 문제가 한 국가의 군신의 논리를 넘어 사대라는 개념상에서 군주 위에 또 다른 군주인 황제에 대한 의라는 문제로 넘어 언급이 되고 그것이 반정의 정당한 명분이 되었기 때문에 특수한 케이스라는 뜻이겠죠.
    보다 이해를 돕자면 가족 구성원을 시작으로 효라는 수직적 관계를 확립하여 이를 군신의 관계인 충으로 확장해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던 유교의 이념은 천년을 자리잡으며 특정 사상이라기 보단 사회와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문화로 인식된 부분입니다. 송대 불교의 철학을 수용하며 유교식 우주관으로 발전한 성리학과 이를 배우는 사대부의 존재는 유교의 예법이라는 개념을 보다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틀을 구축했던 집단이죠. 조선의 사대주의는 이중에 일부일 뿐입니다. 이덕일씨의 주장은 보편적 문화로 인식하는 충효의 군신관계라는 개념이 사대부들의 인식체계를 통해 어찌 왜곡되었는가를 지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無碍子 2012/03/29 20:15 #

    이덕일의 주장 “서인이 볼 때, 조선의 임금은 왕이 아니다.”에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 Esperos 2012/03/29 12:01 #

    이덕일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애당초 묘호를 쓰면 안 됩니다. 묘호를 씀 역시 천자의 예법이니까요. 하지만 조선에서는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묘호를 썼지요. 제사에서도 대뢰를 제물로 쓰면 안 됩니다. 그것도 천사의 예법이거든요. 하지만 조선은 썼죠. 예송논쟁에서 사대부의 예를 왕실에 주장한 것은 왕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사대부로 본 게 아니라 '천하동례'의 이상을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주자가례가 나오기 이전에 확립된 왕실전통은 주자적 예론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요. 그래서 왕실의례도 주자의 예론과 일치하는, 즉 주자 예법의 장엄판으로 구성하길 원했기 때문이지요.

    성리학의 교조화로 생각해야 할 것을 '조선 대신들은 왕도 신하, 사대부로 보았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다니, 정말....
    '
  • 無碍子 2012/03/29 20:17 #

    천조국에서 내린 시호가 엄연히 있는데 조·종이라는 묘호를 썼지요. 그분의 주장대로라면 서인들이 그것부터 바로 잡자고 나섰어야 정상입니다.
  • ㅋㅋ 2012/03/31 03:29 # 삭제

    대신 중국에 보내는 연호나 공문에 선왕을 지칭할때는 선신 공각왕, 선신 장효왕 이렇게 표현했지 묘호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일본이나 유구에 보내는 공문에서 선왕을 지칭할 때도 묘호는 사용하지 않았지요.
  • Esperos 2012/03/31 03:35 #

    그 비슷한 짓은 고려나 베트남도 했죠. 흔히 고려를 외왕내제라고 하는데, 조선도 고려보다 정도만 약할 뿐 외왕내제 비슷한 줄타기를 하죠.
  • 공손연 2012/03/30 02:16 # 삭제

    너무 고식적으로 해석하시는 것 같군요.

    뭐 이덕일이가 헛소리하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지만 이건 그냥 현상에 대한 인상비평으로 넘기면 그다지 문제될것도 없습니다.

    임금을 몰아내는 명분이 황제폐하에 대한 불충이라면 이덕일이가 그런말 못할게 뭐가 있습니까?
    결국 서인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명분을 왕을 몰아냈으니 왕이 아니라는 소리 못할것도 없지요.

    이 문제는 법률문제도 아니고 딱히 원칙따져서 비판할 것은 못됩니다. 아무리 이덕일이가 헛소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이정도가지고 따지만 그간의 헛소리에 비판이 오히려 흐릿해질 우려마저 있습니다.

    이 정도는 걍 두는게 정답일듯요.
  • 공손연 2012/03/30 02:23 # 삭제

    우클릭이 안되니 틀린 문장을 못 고치네요.
  • ㅋㅋ 2012/03/31 03:31 # 삭제

    자의대비의 상복을 장남과 장자부의 예로 하는가 아니면 효종이 원래 차남이었으니 차남과 둘째며느리(중자와 중자부)대로 하느냐의 문제였었음. 국왕과 사대부의 장례예법은 부수적인 문제였고 주요 문제는 효종이 장남이냐 차남이냐 하는 것입니다.

    국왕과 사대부의 장례를 천하동례로 보느냐 왕사부동례로 보느냐 하는 것도 하나의 문제인데 이덕일은 무슨 서인이나 송시열이 조선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대부로 본다는 억측과 억지를 늘어놓고 있지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구글검색창


www http://soakaeofh.egloos.com/

무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