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삼국지에서 만총이 양표를 고문한 이야기 2012/01/13 19:18 by 無碍子

삼국지연의와 삼국지의 기록이 약간 다르니 착오 없으시기를,
후한말기 삼국시대 초기, 조조(曹操)가 헌제(獻帝)를 옹위하여 허창(許昌)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 때 회남에 웅거하던 원술(袁術)이 황제를 참칭 반역을 했고, 태위(太尉)를 역임한 양표(楊彪)가 원술과 통했다는 고발이 들어와 체포되었다.
당시 허창의 현령(縣令)은 만총(滿寵)이란 사람이었다.
상서령(尚書令) 순욱(荀彧), 소부(少府) 공융(孔融) 등 허창의 선비들은 만총에게 달려가 부탁했다.
“양표는 오래전에 원술과 통했다 하더라도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교류를 끊은 것이 분명하므로 혹독하게 수사하지 말고 대충수사하고 방면해 주시오.”
원래 이 사건은 성립 자체가 안되는 사건이었다. 원술의 형인 원소(袁紹)가 현직 태위로 기주목사(冀州牧使)를 겸임하고 있었고, 원씨 집안은 문생고리만천하(門生故吏滿天下)를 자랑하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의 명문가로 조정 대신들이 거의 대부분 그들과 인연을 맺고 있어 누구든 걸면 걸리는 상황이었다.
(사세삼공:4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 문생:학문을 배운 제자, 고리:관리로 발탁된 자.)

만총은 이들의 청탁에 일언반구 대꾸도 않고 돌려보내고 철저히 수사했다. 며칠 동안 계속된 고문에도 양표가 원술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자백은 받아내지 못해 무죄로 수사가 종료되었다. 만총은 수사보고서를 가지고 조조에게 보고했다.
“철저히 수사했지만 양표가 원술의 반역에 가담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고, 자백이나 증언도 없었습니다. 무죄가 분명하므로 방면해야 합니다.”
조조는 만총의 보고에 따라 양표를 석방시켰다.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고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화를 냈었지만 철저한 수사로 누명을 벗게 되자 도리어 고마워했다. 봐주기식 수사가 아닌 철저한 수사는 명예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만총이 양표를 철저히 수사했기 때문에 그 누명이 벗어져 양표의 아들 양수는 낭중(郎中)으로 발탁되어 조조가 승상(丞相)이 되었을 때 승상부(丞相府)의 주부(主簿)를 겸하는 고관이 된다.
만약 양표를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대충 수사해서 방면했더라면 양표는 평생 원술과 통했던자 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았을 것이다.


반전
조조와 유비(劉備)의 한중 공방전 때 조조가 저녁을 먹다가 국 그릇 속의 닭갈비를 보고 계륵(鷄肋)이란 군호를 냈는데 양수는 계륵이란 뼈는 많고 살은 없는 음식이므로 조조가 한중을 포기하고 철군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군심이 술렁이자 조조는 양수를 죽여 버린다. (근데 승상 쯤 되면 닭갈비 국이 아니라 닭다리나 가슴살로 국을 끓여 바쳐야 되는 것 아냐?)
만약 만총이 양표를 대충 건성으로 수사해서 방면했더라면 양수는 역적과 통교한 자의 아들이라는 원죄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으므로 평생 책 읽고 글 쓰면서 별 탈 없이 잘 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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