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백제 최후의 전장 황산벌과 기벌포(보충 포스트) 2011/08/07 19:23 by 無碍子

삼국사기 기록으로 바탕으로 그 현장을 봅니다.

7월 9일

신라군 황산벌 전장에 도착. 백제군 지형상 우위를 점함. 신라군 4전 4패

날짜불명(1)

신라 흠순의 아들 반굴(盤屈), 품일의 아들 관장(官狀) 전사

날짜불명(2)

황산벌

신라군 대승 계백 전사, 백제 지휘부 괴멸

기벌포

당군 백제군 대파

날짜불명(3)

신라군 기벌포 도착, 소정방 김유신에게 늦었다고 책망

7월 12일

나당 연합군 소부리(所夫里)로 진격

7월 13일

의자왕 부여도성 탈출, 백제 태자 부여 융 투항

7월 18일

의자왕 항복

날짜불명(1)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날짜불명(2)계백의 전사일은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신라군이 4전 4패로 기록 된 날은 아니라고 보고 그 다음 날인 7월 10일로 봅니다.
날짜불명(3)소정방이 김유신의 군대가 늦었다고 책망하는 날은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정황으로 봐서 신라군이 기벌포에 도착한 날은 7월 11일로 보입니다. 12일에는 소부리로 진군했다고 했지 그전에는 뭘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에 12일 이전이 됩니다.
지리정보에 어두운 신라군이 막사를 걷고 치중을 수레에 싣고 하루만에 기벌포에 도달했다면 지리정보에 밝은 백제 패잔병이 그보다 더 빨리 도착하는 거 이상한일이 아닙니다.
리플에 의하면 백마강이 지금은 작은 강이지만 백제 멸망 당시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내해와 같았을 거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군도 기벌포에서 사비도성으로 진군할 때 수륙병진 했으므로 백제의 패잔병도 배를 이용하여 기벌포로 내려갈 수 있었겠습니다.
7월이 장마철이라고 하신 분도 계시는 데 삼국사기에 표기된 날짜는 음력입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 묘사한 5.25 당시 후퇴하던 국군의 몰골입니다.

내 부하는 내가 챙겨야 했다. 물론 육군본부의 명령계통이 엄존했으나 흘러 다니는 장병들을 명령만으로 장악할 수 없었다. 장병이 곁을 떠나면 지휘관도 막을 도리가 없다. 연대장 대대장 참모진은 스스로 챙겨 사단의 골격을유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육본이 예하 지휘관의 인사명령을 내린다기 보다는 실재하는 지휘관을 추인하는 경우가 허다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단장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장수들과 비슷한 입장이었다 할 수 있겠다.
전쟁 전 예편됐던 金錫源준장이7월초 수도사단장에 복귀하자 많은 장교들이 金장군 아래로 몰려들었다. 당시 그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나의 부하이던 12연대장 崔慶祿대령과 작전참모 金德俊소령이 이때 수도사단으로 떠났다. 그러나 어려운 전시에 자기가 믿는상관 곁에서 싸우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5사단 작전참모이던文亨泰중령은 金장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나 내곁에 남아주었다. 그는“나와 함께 싸우는 게 어떤가”하고 의중을 묻자“사단장님이 괜찮으시다면 1사단에서 싸우겠다. 미군이 참전하게된 이상 미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분 밑에서 싸우겠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의 전쟁 양상을 예견하는 듯 했다.

군과 나, 백선엽, 제2장 낙동강까지 300km후퇴길

사단장이 살아 눈 뜨고 있는 상황, 아니 비록 패전으로 후퇴하지만 나름대로 전황을 잘 수습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중견 장교들은 자기가 공을 세우기 유리한 장군, 혹은 생존에 유리한 장군에게 달려갔습니다.

1950년 12월 18일 대구역 앞 풍경,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멕여서 보내려는 어머니. 저 아들이 어머니가 낳아준 몸 그대로 건강하게 돌아왔으리라 믿으며 이 땅에 다시는 저리도 서러운 이별하는 모자가 없기를 바란다.

황산벌에서 최고사령관이 전사하고 장성들이 무더기로 포로가 된 상황에서 패잔병 일부는 신라군에 투항했을 것이고 일부는 다른 장군 즉 계백보다 더 뛰어난 장군에게 달려가는 거 당연하다고 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왜곡론의 반론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저술입니다. 저작이 아닙니다. 이를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합니다.
김부식은 당시 사서에서 삼국관련 내용만 뽑아 정리한 겁니다. 그래서 고구려본기에‘始祖 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一云鄒牟 一云衆解’라고도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제본기에도 백제 시조를 未知孰是라고 했습니다.
그냥 당시 사서에 있는데로 옮긴 것뿐입니다. 아마 지금도 삼국사기를 무시하고 二十四史에서 삼국관련 기록을 뽑는다면 삼국사기와 같은 책이 될 겝니다.

신라기원은 올리고 고구려 기원은 내렸다고?
고구려는 주몽이 건국한 나라라는 게 명확하다는 거, 그러나 신라는 박혁거세 이전에도 사로국이 존재했었는데 김부식이 사로국을 무시하고 박혁거세를 시조로 만들어 신라 기원을 깎아 내렸다고는 보면 안되나요?

 


덧글

  • Warfare Archaeology 2011/08/07 19:49 #

    백선엽 장군에 대한 예시는 흥미롭네요. 현재 직속상관이 살아있음에도 저런 현상이 벌어지고, 아무리 전시라지만 그게 용인이 되다니...흐음. 흥미롭습니다. ^^
  • 無碍子 2011/08/07 23:43 #

    그게 당시 이나라의 꼬라지였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8/07 23:45 #

    휴우...한편으론 씁쓸하기까지 합니당. 쩝...
  • 無碍子 2011/08/07 23:56 #

    당시 사단장이라는 분들은 겨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짬밥 1~2년 정도 먹은 게 군사경력의 전부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보는 게 도리어 문제가 있습니다. 백선엽이 육참총장이 되었을 때 나이가 겨우 32세였습니다.
    정일권은 3살 더 많았고요.
  • Warfare Archaeology 2011/08/08 10:54 #

    흐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사단장이라. 휴우~~
  • DreamersFleet 2011/08/07 20:05 #

    으잉. 이 논쟁 별로 비호감이긴 한데 하두 난리라 본인도 좀 보니 신라본기에 이런 말이 있군요.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階伯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人陳, 力戰死, 左將軍品日, 喚子官狀【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纔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昌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階伯, 階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况壯士乎, 乃許生還,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搴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掬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三軍見之, 慷槪有死志, 鼓噪進擊, 百濟衆大敗, 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致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劍自躍出鞘, 定方右將董寶亮躡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使左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餼豐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

    다시 관련 부분만 보자면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階伯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分軍爲三道, 四戰不利(이날 4패), .....官昌(관창의 활약)..... 階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况壯士乎, .... 階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 階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계백 전사), 是日(같은 날),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致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당이 기벌포에서 승리),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당나라 영에서 김유신과 회합).... 百濟王子使左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백제왕자의 애걸),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又使上佐平致▩餼豐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詣前乞罪, 又揮之, 十三日, 義慈率左右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出降(의자왕의 도망과 왕자융의 투항)

    여기서 10일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는데 계백의 전사일과 기벌포의 패배가 그 날이라고 단정하시는지요?
  • 無碍子 2011/08/07 23:44 #

    착오가 있었기에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8/07 20:53 #

    근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황산벌 전투의 종결 시점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9일 당일에 끝났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따지게 되면 신라군의 기동 속도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요. 전투가 10일에 종료되었다면 이른 시각(아침)에 완료되었다고 쳐도 신라군이 기동하기에는 상당히 시일이 촉박하긴 합니다.

    게다가 사료 상으로는 백제의 남쪽(百濟南)이라고만 접선 위치가 나타나고 있어, 접선 위치 자체가 기벌포나 웅진강 입구와 별개로 볼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군도 웅진 방향으로 더 이동한 상태에서 접선하게 되니 10일에 전투가 끝났다고 해도 역시 기동에 문제는 없게 되죠.

    이것 저것 사료를 살펴보면 볼수록, 황산벌의 패잔병이 웅진구에서 싸웠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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